두 종류의 중도
정치적으로 중도인 데에는 뚜렷이 구분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의도적인 중도와 우연한 중도다. 의도적 중도는 트리머(trimmer)다. 좌우 극단 사이의 정확히 중간 지점을 의도적으로 선택한다. 반면 우연한 중도는 평균적으로 봤을 때 중간에 놓이게 될 뿐이다. 매 사안마다 스스로 판단해 결론을 내리는데, 극우와 극좌가 대략 비슷한 정도로 틀리기 때문이다.
의도적 중도와 우연한 중도는 의견의 분포를 보면 구분할 수 있다. 어떤 사안에 대해 극좌의 입장을 0, 극우의 입장을 100이라 할 때, 의도적 중도의 입장은 모든 사안에서 50 근처에 머문다. 반면 우연한 중도의 의견은 넓은 범위에 걸쳐 흩어져 있다. 다만 의도적 중도와 마찬가지로 평균을 내면 대략 50이 된다.
의도적 중도는 그런 점에서 극좌나 극우와 닮았다. 그들의 의견이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다. 좌우를 막론하고 이데올로그의 결정적 특징은 의견을 일괄로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 골라 담을 수 없다. 세금에 대한 견해를 알면 성에 대한 견해도 예측할 수 있다. 의도적 중도는 이데올로그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의 신념 — 이 경우엔 ‘입장’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 역시 일괄로 획득된다. 중앙값이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이동하면 의도적 중도도 함께 이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중도이기를 그만두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 우연한 중도는 답을 스스로 고를 뿐 아니라 질문 자체를 스스로 고른다. 좌우 모두가 지극히 중요하다고 여기는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연한 중도의 정치적 성향을 측정할 수 있는 건 그들이 관심을 갖는 질문과 좌우가 관심을 갖는 질문이 겹치는 부분에서뿐이며, 그 교집합은 때로 사라질 정도로 작아지기도 한다.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다”라는 말은 단순히 상대를 조종하려는 수사적 속임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개는 그 자체로 틀린 말이기도 하다.
중도는 때로 비겁하다는 조롱을 받는다. 특히 극좌로부터 그렇다. 의도적 중도를 비겁하다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 맞을지 몰라도, 우연한 중도로서 공개적으로 살아가는 데에는 오히려 가장 큰 용기가 필요하다. 좌우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공격받으면서도, 큰 집단의 정통 구성원이라는 안락함에 기대어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가장 인상적인 사람들은 거의 모두 우연한 중도다. 내가 프로 운동선수나 연예계 사람들을 많이 알았다면 이야기가 달랐을지도 모른다. 극좌나 극우에 서 있다고 해서 달리는 속도가 달라지거나 노래를 더 잘하게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은 그 일을 잘하려면 독립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다루는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독립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적으로는 맹목적으로 교조적이면서도 훌륭한 수학자일 수는 있다. 20세기에는 아주 똑똑한 사람들 중에도 마르크스주의자가 많았다. 다만 마르크스주의가 다루는 주제에 관해 똑똑한 사람은 그중에 없었다. 하지만 당신의 작업에 쓰이는 아이디어가 당대 정치와 교차한다면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우연한 중도가 되거나, 아니면 평범함에 머무르거나.
주석
[1] 이론상으로는 한쪽이 완전히 옳고 다른 쪽이 완전히 틀릴 수도 있다. 실제로 이데올로그는 언제나 그렇다고 믿어야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2] 어째서인지 극우는 중도를 배신자로 경멸하기보다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극우가 극좌보다 덜 이념적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더 자신감이 있어서, 혹은 더 체념해서, 혹은 단순히 더 조직화되어 있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솔직히 알 수 없다.
[3] 이단적인 의견을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공개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표현하지 않을 때 그 의견을 유지하기가 더 쉬울 수도 있다.
감사의 말
초고를 읽어 준 Austen Allred, Trevor Blackwell, Patrick Collison, Jessica Livingston, Amjad Masad, Ryan Petersen, Harj Taggar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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