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쓰기
글쓰기가 좋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문장 자체가 좋아 들릴 수 있고, 담긴 생각이 옳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매끄럽고 유려한 문장을 쓸 수 있고, 중요한 문제에 대해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좋음은 마치 자동차의 속도와 색깔처럼 서로 무관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잘 들리는 글이 옳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장 흥미로운 종류의 아이디어를 마주한 셈이다. 터무니없어 보이면서도 사실인 아이디어 말이다. 자세히 살펴보자. 이게 어떻게 사실일 수 있을까?
나는 글쓰기를 통해 이것이 사실임을 안다. 서로 무관한 두 가지를 동시에 최적화할 수는 없다. 한쪽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결국 다른 한쪽을 희생하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밀어붙여도 가장 잘 들리는 문장과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하는 문장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힌 적이 없다. 만약 그런 선택을 해야 했다면 문장이 어떻게 들리는지에 신경 쓰는 건 한가한 짓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로 느껴진다. 어색하게 들리는 문장을 고치는 일이 오히려 생각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된다. [1]
여기서 옳다는 것은 단순히 사실이라는 뜻 이상이다. 생각을 옳게 벼린다는 것은 생각을 잘 발전시킨다는 뜻이다. 가장 중요한 결론을 도출하고, 각각을 적절한 깊이까지 탐구하는 것이다. 그러니 생각을 옳게 벼린다는 것은 참된 말을 하는 것을 넘어, 참된 말 중에서도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는 일이다.
문장이 잘 들리게 만들려는 노력이 어떻게 생각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 단서는 30년 전 내 첫 책의 편집을 하던 때 발견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텍스트 배치를 하다 보면 운이 나쁘게 걸릴 때가 있다. 예를 들어 한 단락이 페이지보다 한 줄 더 길어지는 경우다. 일반적인 조판공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부분을 한 줄 짧아지도록 다시 썼다. 이런 자의적인 제약이 글을 더 나쁘게 만들 거라고 예상할 법도 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번도 그렇지 않았다. 결과는 언제나 내가 더 마음에 들어 하는 글이었다.
이게 내 글이 특히 허술해서 그랬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가 쓴 글이든 무작위로 한 단락을 집어 조금 더 짧게(혹은 길게) 고쳐 보라고 하면, 대부분 더 나은 글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현상에 대한 가장 적절한 비유는 여러 물건이 담긴 통을 흔드는 것이다. 흔드는 동작은 자의적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특정한 두 물건이 더 꼭 맞도록 계산된 움직임이 아니다. 그럼에도 반복해서 흔들면 물건들은 놀라울 정도로 교묘한 방식으로 서로 빈틈없이 채워진다. 중력은 물건들이 더 느슨하게 담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더 나아지는 방향일 수밖에 없다. [2]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어색한 부분을 다시 써야 한다면, 그걸 더 틀리게 고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중력이 물건이 위로 뜨는 것을 허락하지 않듯, 우리는 그런 걸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에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더 나아지는 변화일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잘 들리는 글이 옳을 가능성이 더 높은 이유는 잘 흔들어진 통이 더 빈틈없이 채워져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그 외에도 다른 무언가가 작용하고 있다. 잘 들리게 하는 것은 단순히 에세이 속 생각을 더 낫게 만드는 무작위한 외력이 아니다. 실제로 생각을 옳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그 이유는 에세이를 읽기 쉽게 만들기 때문이다. 유려하게 흐르는 글은 읽는 데 드는 노력이 적다. 그게 작가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까? 작가가 바로 첫 번째 독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에세이를 쓸 때 쓰는 시간보다 읽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쓴다. 어떤 부분은 50번, 100번씩 다시 읽으며 그 안의 생각을 되새기고, 마치 나무를 사포질하는 사람처럼 스스로에게 묻는다. 걸리는 데는 없는가? 뭔가 잘못된 느낌은 없는가? 그리고 에세이가 읽기 쉬울수록 걸리는 부분을 발견하기도 쉬워진다.
그렇다. 좋은 글쓰기의 두 가지 의미는 적어도 두 가지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잘 들리게 만들려는 노력은 무의식적으로 실수를 고치게 만들고, 의식적으로 고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생각의 통을 흔들어 주기도 하고, 실수를 더 잘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터무니없음의 한 겹을 벗겨낸 김에, 한 겹을 더 추가하지 않을 수 없다. 잘 들리게 하는 것이 단지 생각을 옳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것 이상일까? 잘 들리는 글이 본질적으로 더 옳을 가능성이 높을까?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그것 역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개별 단어 차원에서는 연결 고리가 있다. 영어에는 그 소리가 의미를 닮은 단어가 아주 많고, 종종 놀라울 만큼 미묘한 방식으로 그렇다. Glitter. Round. Scrape. Prim. Cavalcade. 하지만 좋은 글의 울림은 단어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더 크게 달려 있고, 그 차원에서도 연결 고리가 있다.
글이 잘 들릴 때 그건 대개 좋은 리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글의 리듬은 음악의 리듬이나 시의 운율과는 다르다. 그렇게 규칙적이지 않다. 만약 규칙적이었다면 좋은 글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좋은 글의 리듬은 그 안에 담긴 생각과 맞아떨어져야 하는데, 생각은 저마다 온갖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생각이 단순해서 그냥 단정적으로 말하면 된다. 하지만 때로는 더 미묘해서 그 함의를 하나하나 풀어내기 위해 더 길고 복잡한 문장이 필요하다.
에세이는 대화가 정제된 것인 대사가 그러하듯, 정제된 사고의 흐름이다. 그리고 사고의 흐름에는 자연스러운 리듬이 있다. 그래서 에세이가 잘 들린다는 것은 단순히 듣기 좋은 리듬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리듬을 가졌다는 뜻이다. 이는 리듬을 바로잡는 것을 생각을 바로잡기 위한 발견적 방법으로 삼을 수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단지 원리상으로만 그런 게 아니다. 잘 쓰는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낸다. 나는 종종 두 문제를 구분조차 하지 않는다. 그냥 ‘으, 이건 뭔가 들리기에 어색한데,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게 도대체 뭘까?’ 하고 생각할 뿐이다. [3]
글의 울림은 알고 보면 자동차 색깔보다는 비행기 형태에 더 가깝다. Kelly Johnson이 늘 말했듯이, 보기 좋으면 잘 날기 마련이다.
다만 이는 생각을 발전시키기 위해 쓰는 글에만 해당된다.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얻은 뒤에 그에 대해 쓰는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무언가를 만들거나 실험을 한 뒤 논문을 쓰는 경우가 그렇다. 그런 경우 생각은 글보다는 작업 자체에 더 많이 담겨 있기 때문에, 생각은 훌륭해도 글은 나쁠 수 있다. 교과서나 대중적인 개론서의 글이 나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저자가 생각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남의 생각을 묘사할 뿐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의미의 잘 쓰기가 그토록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은 생각을 발전시키기 위해 쓸 때뿐이다.
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럴듯한데, 거짓말쟁이는 어떤가? 말솜씨 좋은 거짓말쟁이가 아름답지만 완전히 거짓인 글을 쓰는 것은 악명 높을 정도로 가능하지 않은가?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메소드 연기 없이는 불가능하다. 아름다우면서도 거짓인 글을 쓰는 방법은 스스로를 거의 믿게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름답고 참된 글을 쓰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당신은 완벽하게 짜인 사고의 흐름을 제시하는 셈이다. 차이는 그 흐름이 세계와 맞닿는 지점에 있다. 당신은 특정한 거짓 전제가 참이라면 사실일 법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기이한 이유로 한 나라의 일자리 수가 고정되어 있다면, 이민자들이 정말로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 더 잘 들리는 글이 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는 것은 엄밀히는 옳지 않다. 더 잘 들리는 글이 내적으로 정합적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다. 만약 작가가 정직하다면, 내적 정합성과 진실은 수렴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글이 사실이라고 안전하게 결론 내릴 수는 없더라도, 그 역은 대개 안전하게 결론 내릴 수 있다. 서툴게 쓰인 것처럼 보이는 글은 대개 생각도 잘못 짚었을 것이다.
실로 좋은 글쓰기의 두 가지 의미는 같은 것의 양 끝단에 가깝다. 둘 사이의 연결은 단단한 막대 같은 것이 아니다. 좋은 글의 좋음은 막대가 아니라 밧줄이며, 여러 겹의 연결이 겹쳐 이어져 있다. 하지만 한쪽 끝을 움직이지 않고 다른 쪽을 움직이기는 어렵다. 제대로 들리지 않으면서 옳기란 어렵다.
각주
[1] 가장 예외에 가까운 경우는 이미 쓴 글 중간에 새로운 논점을 끼워 넣어야 할 때다. 이는 종종 흐름을 망가뜨리고, 때로는 도저히 되돌릴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나는 이 문제의 궁극적인 원인이 생각은 나무 모양인데 에세이는 선형이라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전자를 후자에 욱여넣으려 하면 필연적으로 어려움에 부딪힌다. 솔직히 말해 그 와중에도 이만큼이나 말이 되는 게 놀랍다. 그래도 때로는 각주에 기대야 할 때가 있다.
[2] 물론 통을 너무 세게 흔들면 안에 든 물건들이 오히려 더 느슨하게 담길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글쓰기에 1음절 단어와 2음절 단어를 번갈아 쓰라는 식의 어마어마한 외부 제약을 가하면 생각 역시 타격을 입기 시작할 것이다.
[3] 기묘하게도 이 문단을 쓰는 과정에서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초고에서는 앞 문단과 겹치는 표현이 여러 개 있었고, 다시 읽을 때마다 그 반복이 거슬렸다. 고쳐야겠다는 짜증이 충분히 쌓여 고치기 시작했을 때, 그 반복이 기저의 생각에 있는 문제를 반영하고 있음을 깨달았고, 둘을 동시에 고칠 수 있었다.
감사를 전한다 — Jessica Livingston과 Courtenay Pipkin이 이 글의 초고를 읽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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