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취향이라는 게 있을까?
(이 글은 케임브리지 유니언에서 한 강연을 바탕으로 썼다.)
어릴 때라면 나는 그런 건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어떤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은 다른 것을 좋아한다. 누가 옳은지 누가 판단할 수 있겠는가?
좋은 취향이라는 게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해 보였다. 그래서 아버지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간접적인 증거를 통해서였다. 여기서 내가 제시하려는 것도 바로 그런 증거다. 귀류법에 따른 증명이다. 좋은 취향이라는 게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면 명백히 거짓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전제가 틀렸다는 뜻이다.
먼저 좋은 취향이 무엇인지 말해야겠다. 좁은 의미에서 취향은 미적 판단을 가리키고, 넓은 의미에서는 어떤 종류의 선호든 가리킨다. 가장 강력한 증명은 가장 좁은 의미의 취향, 즉 예술에 대한 취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예술에 대한 취향을 이야기하겠다. 내가 좋아하는 예술보다 당신이 좋아하는 예술이 더 낫다면, 당신의 취향이 나보다 나은 것이다.
좋은 취향이라는 게 없다면 좋은 예술이라는 것도 없다. 좋은 예술이라는 것이 있다면 두 사람 중 누가 더 나은 취향을 가졌는지 쉽게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에게 한 번도 본 적 없는 화가들의 작품을 많이 보여 주고 그중 가장 좋은 작품을 고르라고 해 보자. 더 나은 예술을 고른 사람이 더 나은 취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므로 좋은 취향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싶다면 좋은 예술이라는 개념도 함께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이 예술을 잘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예술가가 자기 일을 잘할 방법이 없어지는 셈이다. 시각 예술가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든 예술가인 사람 모두가 그렇다. 훌륭한 배우나 소설가, 작곡가, 무용수도 있을 수 없다. 인기 있는 소설가는 있을 수 있지만, 훌륭한 소설가는 있을 수 없다.
좋은 취향이라는 개념을 버리면 얼마나 멀리까지 가야 하는지 우리는 잘 깨닫지 못한다. 가장 명백한 경우에는 아예 논쟁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명한 화가 둘 중 누가 더 나은지 말할 수 없다는 정도가 아니다. 어떤 화가도 무작위로 고른 여덟 살 아이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아버지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은 계기는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일도 내가 해 온 다른 종류의 일과 똑같았다.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으며, 열심히 노력하면 더 잘할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와 벨리니가 나보다 그림을 훨씬 잘 그린다는 것은 명백했다. 우리 사이의 격차는 상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말 대단했다. 그들이 잘할 수 있다면 예술도 훌륭할 수 있고, 결국 좋은 취향이라는 것도 존재하는 셈이었다.
좋은 취향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보일 수 있는지 설명했으니, 사람들이 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지도 설명해야겠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취향을 두고 늘 의견이 크게 엇갈린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예술에 보이는 반응은 검토되지 않은 충동이 뒤엉킨 것이다. 화가가 유명한가? 소재가 매력적인가? 사람들이 좋아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종류의 예술인가? 유명한 미술관에 걸려 있는가, 아니면 크고 비싼 책에 복제되어 있는가?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부수적인 요인에 좌우되어 예술에 반응한다.
게다가 좋은 취향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너무 자주 틀린다. 한 세대의 이른바 전문가들이 감탄한 그림은 몇 세대 뒤 사람들이 감탄하는 그림과 크게 다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애초에 실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결론 내리기 쉽다. 그림을 그려 보고 자신의 작품을 벨리니의 작품과 비교하는 식으로 이 힘을 따로 떼어 놓아야만,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예술이 훌륭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또 다른 이유는, 예술 안에 그런 훌륭함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논리는 이렇다. 여러 사람이 한 작품을 바라보며 그것이 얼마나 훌륭한지 판단한다고 상상해 보자. 훌륭한 예술이라는 것이 정말 사물의 속성이라면, 그 속성은 어떤 식으로든 작품 안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각 관찰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서로 의견이 다를 때는 누구의 판단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 수수께끼의 해답은 예술의 목적이 인간 관객에게 작용하는 데 있고, 인간에게는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어떤 사물이 작용하는 대상들이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정도만큼, 그 사물이 그에 대응하는 속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입자가 상호작용하는 모든 대상이 그 입자에 질량 m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그 입자의 질량은 m이다. 따라서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의 구분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정도의 문제다. 주체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공유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서로 상호작용하는 입자들은 한쪽 극단에 있지만, 예술과 상호작용하는 사람들이 다른 쪽 극단에 완전히 놓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반응은 무작위가 아니다.
사람들의 예술에 대한 반응이 무작위가 아니기 때문에 예술은 사람에게 작용하도록 설계될 수 있고,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용하느냐에 따라 훌륭할 수도 있고 형편없을 수도 있다. 백신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어떤 사람이 백신이 면역을 형성하게 하는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면역이 형성되는 일은 각 개인의 면역 체계에서 일어나므로 면역 형성은 백신의 진정한 속성이 아니라고 반박한다면, 그런 반박은 매우 허무맹랑하게 들릴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면역 체계는 다르고, 한 사람에게 효과가 있는 백신이 다른 사람에게는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백신의 효과를 말하는 일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예술의 경우는 더 복잡하다. 백신을 평가할 때처럼 단순히 투표를 해서 효과를 측정할 수는 없다. 예술에 대한 깊은 지식과 화가의 명성 같은 부수적인 영향은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맑은 판단력을 지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해야 한다. 그래도 의견이 어느 정도 엇갈리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사람마다 다르고, 예술을 판단하는 일은 어렵다. 특히 최근의 예술은 더 그렇다. 작품들 사이에도, 작품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능력 사이에도 분명 전순서는 없다. 그러나 양쪽 모두에 부분순서는 분명히 존재한다. 완벽한 취향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좋은 취향을 갖는 것은 가능하다.
감사를 표한다. 나를 초대해 준 케임브리지 유니언과 이 글의 초고를 읽어 준 트레버 블랙웰, 제시카 리빙스턴, 로버트 모리스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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