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에세이
제목이 이렇다고 해서 이 글이 최고의 에세이가 되려는 건 아니다. 여기서 내가 하려는 건 최고의 에세이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곰곰이 따져보는 일이다.
물론 잘 쓰인 글이겠지만, 어떤 주제든 잘 쓸 수는 있다. 그 글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문장이 아니라 다루는 주제일 것이다.
당연히 주제마다 우열이 있다. 올해 유행하는 립스틱 색깔에 대한 글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고상한 주제를 둘러싼 공허한 담론일 리도 없다. 좋은 에세이는 놀라움을 줘야 한다. 사람들이 아직 모르는 무언가를 알려줘야 한다.
최고의 에세이란,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주제를 다룬 글일 것이다.
당연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여기엔 예상치 못한 함의가 있다. 하나는 과학이 마치 뗏목 위로 코끼리가 올라타듯 불쑥 끼어든다는 것이다. 예컨대 다윈은 1844년에 쓴 에세이에서 자연선택이라는 아이디어를 처음 설명했다.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줄 수 있는 중요한 주제라는 바로 그 기준에 비춰보면, 그 에세이는 틀림없이 1844년에 쓰인 최고의 글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어느 시점에서든 쓸 수 있는 최고의 에세이는 대개 그 시점에 발견 가능한 가장 중요한 과학적·기술적 발견을 다룬 글이 될 것이다. [1]
또 다른 의외의 결과도 있다. 글을 쓰기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최고의 에세이는 꽤나 시대를 타지 않을 거라 상상했다. 1844년에 쓸 수 있는 최고의 에세이가 지금 쓸 수 있는 최고의 에세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인 것 같다. 최고의 회화라면 그런 의미에서 시대를 타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자연선택을 소개하는 에세이를 쓴다고 해서 대단하다는 소리를 듣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 최고의 에세이는 우리가 아직 모르는 위대한 발견을 다룬 글이어야 한다.
최고의 에세이를 어떻게 쓰느냐는 문제가 어떻게 위대한 발견을 하느냐는 문제로 귀결된다면, 나는 애초에 잘못된 질문에서 출발한 셈이다. 어쩌면 이 사고 실험이 보여주는 건 우리가 에세이를 쓰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특정 분야에서 발견에 매진해야 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에세이에, 그리고 에세이로 할 수 있는 일에 관심이 있다. 그래서 다른 질문을 던질 수는 없었을지 살펴보고 싶다.
그런 질문이 있다. 겉으로 보기엔 처음 던진 질문과 거의 똑같아 보인다. 최고의 에세이는 무엇일까?라고 묻는 대신 어떻게 하면 에세이를 잘 쓸 수 있을까?라고 물어야 했다는 것이다. 표현만 달라 보이지만 답은 전혀 다르게 갈린다. 보다시피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 에세이 쓰기와 별 관련이 없었다. 두 번째 질문은 답을 에세이 쓰기 자체로 강제한다.
에세이 쓰기는 제대로 하면 아이디어를 발견하는 방법이다. 그걸 어떻게 잘할 수 있을까? 글쓰기를 통해 어떻게 발견에 이를 수 있을까?
에세이는 보통 내가 ‘질문’이라 부를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다만 아주 넓은 의미의 질문이다. 꼭 문법적으로 의문문일 필요는 없다. 어떤 반응을 끌어낸다는 점에서 질문처럼 기능하는 것이면 된다.
이 초기 질문은 어떻게 얻는가? 그럴듯해 보이는 중요한 주제를 무작위로 골라 덤벼든다고 될 일은 아마 아닐 것이다. 전문 트레이더들은 이른바 엣지가 없으면 거래조차 하지 않는다. 특정 부류의 거래에서 왜 자신이 잃는 것보다 더 많이 이길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논리다. 마찬가지로 어떤 주제에 덤벼들 때도 진입로가 없으면 안 된다. 그 주제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나 접근법 같은 것이다.
완벽한 논지를 갖출 필요는 없다. 파고들 수 있는 틈만 있으면 된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엣지가 될 수 있다.
충분히 puzzling한 질문을 마주쳤다면, 그게 대단해 보이지 않더라도 탐구할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중요한 발견 중에는 처음엔 하찮아 보이던 실타래를 잡아당기다 이뤄진 경우가 많다. 쟤들이 전부 다 핀치라고? [2]
질문을 하나 잡았다면 다음은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해 소리 내어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실제로 입 밖으로 말하라는 뜻은 아니다. 마치 말하듯 반응을 특정한 문장들로 고정하는 것이다. 이 초기 반응은 대개 틀렸거나 불완전하다. 글쓰기는 당신의 아이디어를 모호한 상태에서 나쁜 상태로 바꾼다. 하지만 그건 전진이다. 어디가 잘못됐는지 보여야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초보 작가들은 뭔가 틀리거나 불완전한 것에서 출발한다는 생각에 겁을 먹을지 모른다. 그럴 필요 없다. 바로 그 때문에 에세이 쓰기가 작동하는 것이니까. 스스로를 특정한 문장에 커밋하도록 강제하면 출발점이 생기고, 그게 틀렸다면 다시 읽을 때 알게 된다. 에세이 쓰기의 절반 이상은 자신이 쓴 걸 다시 읽으며 이게 맞고 완전한가?를 묻는 과정이다. 다시 읽을 때는 매우 엄격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정직하려는 차원을 넘어, 당신의 대답과 진실 사이의 간극이 종종 새로 발견할 아이디어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쓴 글에 엄격해지는 대가는 단순한 다듬질에 그치지 않는다. 대략 맞는 답을 정확히 맞추려다 보면 때로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고, 그 이유가 잘못된 전제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임을 깨닫게 된다. 그 전제를 버리면 답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3]
이상적으로 질문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여야 한다. 진실로 수렴해 가는 과정의 첫걸음이자, 추가 질문들의 원천(내가 쓰는 넓은 의미의 질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반응이 반응을 낳으며 과정은 재귀적으로 이어진다. [4]
보통 하나의 질문에는 여러 가능한 반응이 있다. 즉 당신은 트리를 탐색하는 셈이다. 하지만 에세이는 트리 모양이 아니라 선형이다. 따라서 매 지점에서 따라갈 가지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어떻게 고를까? 보통은 일반성과 새로움의 조합이 가장 큰 쪽을 따라가야 한다. 나는 의식적으로 가지들의 순위를 매기진 않는다. 그저 가장 흥미롭게 느껴지는 쪽을 따라갈 뿐이다. 하지만 어떤 가지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일반성과 새로움이다. [5]
고쳐 쓰기를 많이 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처음부터 정답을 맞힐 필요는 없다. 한 가지를 따라가 보고 결과를 지켜본 뒤, 별로라면 잘라내고 되돌아가면 된다. 나는 늘 그렇게 한다. 이 에세이에서도 이미 17개 문단짜리 서브트리를 잘라냈고, 그보다 짧은 것들은 셀 수도 없이 잘라냈다. 나중에 끝에 다시 붙일지, 각주로 줄일지, 따로 떼어 독립된 에세이로 만들지, 두고 볼 일이다. [6]
일반적으로 잘라내는 데는 빨라야 한다. 글쓰기(그리고 소프트웨어나 회화)에서 가장 위험한 유혹 중 하나는, 몇몇 괜찮은 대목이 들어 있다거나 많은 공을 들였다는 이유만으로 옳지 않은 것을 붙잡아 두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튀어나오는 가장 놀라운 새 질문은 초기 질문이 정말 중요한가?이다. 아이디어의 공간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면 그리 중요하지 않아야 한다. 어떤 질문에서든 몇 번의 도약으로 가장 가치 있는 질문들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공간이 실제로 촘촘하다는 증거는, 예컨대 어떤 주제에 집착하는 사람이 어떤 대화든 자기 주제로 끌고 가는 모습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목적지를 알고 있을 때만 통한다. 에세이에서는 목적지를 모른다. 그게 핵심이다. 당신은 집착적인 대화 상대가 되고 싶지 않다. 그러면 모든 에세이가 같은 얘기가 되고 말 테니까. [7]
초기 질문이 중요한 다른 이유는, 보통 그 질문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가지를 따라갈지 결정할 때 이걸 의식하지 않는다. 그냥 새로움과 일반성을 따라갈 뿐이다. 질문에 붙어 있기라는 건 나중에, 너무 멀리 벗어났음을 깨닫고 되돌아가야 할 때 강제된다. 하지만 나는 그게 최적의 해법이라 생각한다. 새로움과 일반성을 좇는 사냥이 그 순간에 제약받게 하고 싶지 않다. 그냥 따라가 보고 무엇이 나오는지 보자. [8]
초기 질문이 어쨌든 제약을 가하므로, 최상의 경우 그것은 당신이 쓸 에세이의 품질에 상한을 설정한다. 초기 질문에서 이어지는 생각의 사슬을 할 수 있는 한 가장 잘 전개한다면, 변화를 줄 여지가 남는 곳은 초기 질문 자체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때문에 너무 보수적이 되는 건 실수다. 질문이 어디로 이끌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대로 하고 있다면 예측할 수 없다. 제대로 한다는 건 발견을 한다는 뜻이고, 발견은 정의상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상황에 대응하는 방법은 초기 질문을 고를 때 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에세이를 많이 쓰는 것이다. 에세이는 모험을 위한 것이다.
거의 어떤 질문으로도 좋은 에세이를 쓸 수 있다. 사실 세 번째 문단에서 충분히 가망 없어 보이는 주제를 찾는 데도 약간의 노력이 들었다. 최고의 에세이는 x에 대한 글이 될 수 없다고 들으면 어떤 에세이스트든 첫 충동은 그 x에 대해 써 보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질문이 좋은 에세이를 낳는다고 해도, 위대한 에세이를 낳는 건 그중 일부뿐이다.
어떤 질문이 위대한 에세이를 낳을지 예측할 수 있을까? 내가 에세이를 써 온 시간을 생각하면, 이 질문이 이렇게 새롭게 느껴진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내가 초기 질문에서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파격성이다. 나는 어딘가 불량한 느낌을 주는 질문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직관에 반하거나, 지나치게 야심차거나, 정통에서 벗어난 식으로. 이상적으로는 세 가지를 다 갖추면 좋다. 이 에세이가 그 예다. 최고의 에세이에 대해 쓴다는 건 그런 게 존재한다는 걸 함축하는데, 사이비 지성인들은 그걸 환원적이라며 일축할 것이다. 하지만 한 에세이가 다른 에세이보다 낫다는 가능성만 인정해도 논리적으로 당연히 따라오는 결론이다. 그리고 그렇게 야심 찬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실제로 하는 것에 가까울 만큼 주의를 붙잡아 둔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에세이를 시작하는 걸 좋아한다. 이건 그냥 내 취향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중 한 가지는 취향을 넘어선다. 어떤 주제에 대해 정말 좋은 에세이를 쓰려면 그 주제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작가는 무엇에 대해서든 잘 쓸 수 있다. 하지만 에세이의 존재 이유인 새로운 통찰까지 끌어내려면 애정이 있어야 한다.
애정이 좋은 초기 질문의 기준 중 하나라면, 최적의 질문은 사람마다 다르다. 또 이는 다양한 것들에 애정을 가질수록 위대한 에세이를 쓸 확률이 높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호기심이 많을수록 당신이 궁금해하는 것들의 집합과 위대한 에세이를 낳는 주제들의 집합이 겹칠 가능성도 커진다.
위대한 초기 질문은 또 어떤 성질을 가져야 할까? 아마 여러 영역에 걸쳐 함의를 가지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미 철저히 탐구되었다고 생각하는 주제라면 오히려 좋은 징조라고 나는 느낀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초기 질문을 어떻게 고를지 거의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애초에 고르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 무엇을 쓸지 고르는 경우가 드물다. 그냥 뭔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할 뿐이고, 때로 그게 에세이가 된다.
지금 문득 떠오른 것에 대해 에세이를 쓰는 걸 멈추고, 체계적으로 생성된 주제 목록을 하나씩 처리해 나가게 될까? 별로 재미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좋은 에세이를 쓰고 싶고, 초기 질문이 중요하다면 신경을 써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답은 한 단계 더 앞에 있을지 모른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에 대해 쓰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자체가 좋은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이게 답일 수밖에 없다. 그 주제들에 대해 엣지가 없다면 주제 목록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에세이를 쓰기 시작하려면 주제와 그에 대한 초기 통찰이 함께 있어야 하는데, 그걸 체계적으로 생성할 수는 없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9]
다만 그런 것들을 더 많이 떠올리도록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머릿속에서 나오는 아이디어의 질은 들어가는 것에 달려 있고, 그걸 두 가지 차원, 즉 넓이와 깊이에서 개선할 수 있다.
모든 걸 배울 수는 없으니 넓이를 얻는다는 건 서로 매우 다른 주제들을 배우는 걸 의미한다. 헤이Hay에서의 책 사냥에 대해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그들이 어떤 책을 사냐고 물으면, 나는 보통 좀 멋쩍게 대답한다. 주제들이 서로 관련 없는 항목들의 나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 일에서는 그게 실제로 최적일지도 모른다.
아이디어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무언가를 직접 해보고 만들며, 어딘가에 가서 무언가를 보면서도 얻을 수 있다.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당신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갖게 하는 부류의 사람과 대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똑똑한 새로운 사람 20명과 대화하는 것보다 Robert Morris와 오후 내내 대화하고 난 뒤에 더 많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다. Y Combinator의 오피스 아워 한 블록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에 나는 안다.
넓이가 읽고 대화하고 보는 데서 온다면, 깊이는 하는 데서 온다. 어떤 영역을 진짜로 배우는 방법은 그 안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그것이 글쓰기 형태를 띨 수도 있지만, 나는 좋은 에세이스트가 되려면 다른 종류의 일도 병행하거나 병행한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분야 대부분에서는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에세이 쓰기는 다르다. 절반의 시간을 다른 일에 쓰더라도 그 일이 어렵기만 하다면 결국 이득이다.
이걸 처방으로 제안한다기보다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격려로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생 대부분을 다른 일에 매진해 왔다면 이미 절반은 온 셈이다. 물론 글을 잘하려면 글을 좋아해야 하고, 글을 좋아한다면 어느 정도는 글을 써 왔을 것이다.
초기 질문에 대해 말한 모든 것은 에세이를 쓰는 도중에 마주치는 질문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둘은 같은 것이다. 에세이의 모든 서브트리는 보통 더 짧은 에세이이며, Calder의 모빌에서 모든 서브트리가 더 작은 모빌인 것과 같다. 따라서 좋은 초기 질문을 얻는 기술은 좋은 에세이 전체를 얻는 기술이기도 하다.
어느 지점에서 질문과 응답의 순환은 자연스러운 끝에 도달한 것처럼 느껴진다. 좀 수상쩍다. 모든 답이 더 많은 질문을 낳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내 생각엔 포만감을 느끼기 시작해서 그런 것 같다. 충분히 흥미로운 영역을 다루고 나면 새로운 질문에 대한 식욕을 잃기 시작한다. 그거야말로 잘된 일이다. 독자 역시 포만감을 느끼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질문을 멈추는 게 게으른 것도 아니다. 대신 새로운 에세이의 초기 질문을 던질 수 있으니 말이다.
그것이 아이디어의 연결성에 제동을 거는 궁극적인 원인이다. 가는 도중에 하는 발견들이다. 질문 A에서 출발해 충분히 많은 것을 발견하면 질문 B에는 절대 도달하지 못한다. 하지만 계속 에세이를 쓰다 보면 그런 발견들을 소진하며 이 문제를 점차 해결하게 된다. 그래서 기묘하게도 에세이를 많이 쓰면 아이디어의 공간이 더 촘촘히 연결된 것처럼 느껴진다.
서브트리가 끝에 도달하면 두 가지 중 하나를 할 수 있다. 멈추거나, 이전에 건너뛴 질문으로 돌아가 별개의 서브트리들을 이어 붙이는 큐비즘적 트릭을 쓰는 것이다. 보통은 이 지점에서 에세이가 매끄럽게 이어지도록 약간의 묘기가 필요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다. 이번엔 실제로 그 현상의 예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앞서 최고의 에세이는 최고의 회화처럼 시대를 타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는 걸 발견했다. 이건 더 파고들 가치가 있을 만큼 놀라운 일이다.
에세이가 시대를 타지 않는다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영원히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것과, 독자에게 언제나 같은 효과를 주는 것이다. 예술에서는 이 두 의미가 뒤섞인다. 고대 그리스인에게 아름다워 보였던 예술이 우리에게도 여전히 아름다워 보인다. 하지만 에세이에서는 두 의미가 갈린다. 에세이는 가르치기 때문이고, 사람들은 이미 아는 것을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선택은 분명 영원히 중요한 문제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에세이는 다윈 동시대에 미쳤을 때와 같은 효과를 우리에게 줄 수 없다. 그의 아이디어가 너무 성공적이어서 이제는 모두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10]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나는 최고의 에세이는 더 엄격한 의미, 즉 에버그린으로서 시대를 타지 않을 거라 상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파인만에게 똑같이 어필할 어떤 깊고 시대를 초월한 지혜를 담고 있을 거라고. 그건 사실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최고의 에세이가 보통 그런 엄격한 의미에서 시대를 타지 않는다면, 시대를 타지 않는 에세이를 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 답은 매우 이상하게 나온다. 에버그린으로서 시대를 타지 않으려면 에세이는 비효과적이어야 한다. 그 발견들이 우리의 공유 문화 속으로 흡수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세대 독자에게는 그 안에 새로울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뿐 아니라 미래의 독자까지 놀라게 하고 싶다면, 남지 않을 에세이를 써야 한다. 아무리 훌륭해도 미래 사람들이 읽기 전에 이미 배우는 지식의 일부가 되지 않을 에세이를 말이다. [11]
그걸 달성하는 몇 가지 방법을 상상할 수 있다. 하나는 사람들이 절대 배우지 않는 것에 대해 쓰는 것이다. 예컨대 야심 있는 사람들이 온갖 종류의 상을 좇다가 나중에, 어쩌면 너무 늦게, 그중 일부가 생각만큼 가치 있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패턴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그에 대해 쓴다면 앞으로도 줄줄이 이어질 독자들이 그에 놀라리라는 걸 확신할 수 있다.
미숙한 사람들이 일을 과하게 하려는 경향, 예컨대 젊은 엔지니어들이 지나치게 복잡한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경향에 대해 쓴다면 마찬가지다. 직접 저질러 보지 않고는 피하는 법을 절대 배우지 못하는 종류의 실수가 있다. 그런 것들은 무엇이든 시대를 타지 않는 주제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더디게 깨닫는 것이 둔해서나 부정해서만은 아니고,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들어왔기 때문인 경우도 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거짓말하는 것들은 많고,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당신을 따로 불러 그 목록을 건네주진 않는다. 그들은 당신에게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못하고, 대부분 애초에 암묵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니 그런 거짓말에 반박하는 글은 어른들이 계속 거짓말을 하는 한 놀라움의 원천이 될 것이다.
때로는 시스템이 당신에게 거짓말을 한다. 예컨대 대부분의 나라에서 교육 시스템은 시험을 해킹해서 이기는 법을 훈련시킨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시험들은 그렇게 이기는 게 아니다. 수십 년간 그렇게 훈련받은 뒤에는 현실 세계에 새로 발을 들인 사람들이 이걸 깨닫기가 어렵다. 그런 제도적 거짓말을 극복하도록 돕는 글은 제도가 망가진 채 남아 있는 한 계속 통할 것이다. [12]
시대를 타지 않는 글을 쓰는 또 다른 방법은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문화적으로 전승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디테일로 쓰는 것이다. 예컨대 “누구나” 아이를 갖는 것이 보람 있을 수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막상 갖기 전까지는 그 보람이 정확히 어떤 형태로 오는지 모르고, 갖고 난 뒤에도 당신이 아는 것 중 많은 부분은 한 번도 말로 정리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주제들에 대해 모두 써 봤다. 하지만 더 엄격한 의미에서 시대를 타지 않는 에세이를 쓰겠다는 의도로 일부러 그렇게 한 건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게 아이디어가 남지 않는 데 달려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일부러 노릴 가치가 없음을 시사한다. 물론 시대를 초월해 중요한 주제에 대해 써야 한다. 하지만 너무 잘 써서 당신의 결론이 정착되고 미래 세대가 당신의 에세이를 새롭다기보다 당연하게 느낀다면, 그건 더 좋은 일이다. 당신은 다윈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이다.
하지만 시대를 초월해 중요한 주제에 대해 쓰는 건 더 일반적인 무언가의 한 사례에 불과하다. 바로 적용 범위의 넓이다. 그리고 넓이에는 시간적 넓이 말고도 다른 종류가 있다. 예컨대 수많은 다른 분야에 적용되는 식이다. 그러니 넓이가 궁극적인 목표다.
나는 이미 그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넓이와 새로움은 내가 늘 좇는 두 가지다. 하지만 시대를 타지 않음이 어디에 자리하는지 이해하게 되어 기쁘다.
이제 많은 것들이 어디에 자리하는지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이 에세이는 에세이 쓰기에 대한 일종의 투어였다. 나는 주제에 대한 조언을 얻고자 시작했었다. 글쓰기가 훌륭하다는 걸 전제로 하면 최고의 에세이를 가르는 건 주제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주제에 대한 조언을 얻긴 했다. 자연선택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그렇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한 걸음 물러서서 그런 위대한 발견에 못 미치는 선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물으면 답은 절차에 관한 것이 된다. 궁극적으로 에세이의 질은 그 안에서 발견된 아이디어들의 함수이며, 그 아이디어들을 얻는 방법은 질문을 넓게 던진 뒤 답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해지는 것이다.
이 에세이 쓰기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영감과 노력이 교대로 나타나는 줄무늬다. 질문은 영감에 달려 있지만, 답은 철저한 끈기로 얻을 수 있다. 처음부터 답을 맞힐 필요는 없지만, 결국 맞추지 못할 변명은 없다. 될 때까지 계속 고쳐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단순한 이론적 가능성이 아니다. 내가 일하는 방식을 꽤 정확히 묘사한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고쳐 쓰고 있다.
위대한 에세이를 쓰는 것이 대부분 노력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극한의 경우 차이를 만드는 건 영감이다. 극한의 경우 더 얻기 어려운 건 질문이다. 그 웅덩이에는 바닥이 없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질문을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주석
[1] 이런 발견 중 일부는 소수의 독자만 이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 결론에 저항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에세이를 탈락시키려 하면 온갖 난관에 부딪힌다.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 바이러스가 로스앨러모스에 격리된 몇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죽인다면, 탈락했던 에세이가 이제는 자격을 갖추게 되는가? 등등.
다윈의 1844년 에세이는 1839년에 쓴 초기 원고에서 파생된 것이며, 그 발췌본은 1858년에 출판되었다.
[2] 겉보기에 사소한 질문에 아주 강하게 호기심을 느낀다면, 그건 흥미로운 신호다. 진화는 당신이 중요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설계했다. 그러니 무작위해 보이는 것에 아주 궁금해진다면, 무의식적으로 그것이 보이는 것만큼 무작위하지 않음을 알아챈 것일 수 있다.
[3] 따름정리: 지적으로 정직하지 않으면 당신의 글은 편향될 뿐 아니라 지루해질 것이다. 진실을 향해 밀어붙였다면 발견했을 모든 아이디어를 놓치기 때문이다.
[4] 때로는 이 과정이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에 시작되기도 한다. 이미 말하고 싶은 처음 몇 가지를 정리해 둔 경우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종종 모든 하고 싶은 말을 미리 정해 에세이 본문을 쓰기 전에 개요로 적어 두라고 가르친다. 그게 시작을 돕는 좋은 방법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건 에세이 쓰기의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개요가 자세할수록 당신의 아이디어는 에세이가 본래 의도한 종류의 발견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줄어든다.
[5] 이런 유형의 “탐욕적” 알고리즘의 문제는 지역 최댓값에 갇힐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가치 있는 질문 앞에 지루한 질문이 있으면 놓치게 된다. 하지만 더 나은 전략은 상상하기 어렵다. 글쓰기 말고는 앞을 내다볼 방법이 없다. 그러니 탐욕적 알고리즘과 충분한 시간을 쓰라.
[6] 나는 결국 17개 문단 중 앞의 5개는 다시 붙이고 나머지는 버렸다.
[7] Stephen Fry는 옥스퍼드에서 시험을 볼 때 이 현상을 활용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일반적인 문학 주제에 대한 표준 에세이를 머릿속에 넣어 두고, 시험 문제를 그쪽으로 끌고 간 뒤 그대로 재현하곤 했다.
엄밀히 말하면 촘촘히 연결된 것은 아이디어의 공간이 아니라 아이디어의 그래프이지만, 그렇게 말하면 그래프 이론을 모르는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반면 그래프 이론을 아는 사람은 내가 “공간”이라고 말해도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것이다.
[8] 너무 멀리 갔다는 것은 원래 주제와의 거리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 거리를 해당 서브트리에서 발견한 것의 가치로 나눈 것에 더 가깝다.
[9] 아니면 할 수 있을까? 이 주제로 써 봐야겠다. 성공 확률이 작더라도 기대값은 엄청나기 때문이다.
[10] 20세기에는 예술의 목적도 가르치는 데 있다는 말이 유행했다. 일부 예술가들은 자신의 목표가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작업을 정당화하려 했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예술도 어느 정도는 가르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자연주의 조각은 새로운 아이디어였고, 그 점에서 동시대인들에게는 더 큰 흥분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조각들은 지금 우리 눈에도 여전히 아름답다.
[11] Bertrand Russell은 20세기 초 “시범 결혼”에 대한 아이디어로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지금 읽으면 지루하다. 그 아이디어가 승리했기 때문이다. “시범 결혼”은 우리가 “연애”라고 부르는 것이다.
[12] 10년 전에 물었다면 나는 학교가 앞으로 수세기 동안 시험 해킹을 계속 가르칠 거라 예측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학생들이 곧 AI에게 개별적으로 배우고, 시험이 지속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 평가로 대체되는 미래가 그럴듯해 보인다.
Sam Altman, Trevor Blackwell, Jessica Livingston, Robert Morris, Courtenay Pipkin, Harj Taggar에게 초고를 읽어준 것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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