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였어야 했는데...
요즘 들어 드라마를 보다가 중간쯤에 “이건 영화였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을 하는 일이 점점 잦아지고 있다.
예전에는 반대였다. 영화를 보고 나면 “감독이 이 세계를 더 탐구할 시간이 있었다면 뭘 보여줬을까.” 하고 상상하곤 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바뀌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냥 내가 나이를 먹고 점점 조급해진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예를 들어 세버런스: 단절을 보자. 두 시간짜리 SF 스릴러였다면 정말 뛰어났을 작품이다. 하지만 여러 시즌에 걸쳐 늘어지다 보니, 나는 시즌 2의 매 에피소드를 보면서 문자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핵심 콘셉트 자체는 진심으로 좋아하는데도 말이다.
혹은 플루리버스는 어떤가. 에피소드 9편, 총 8시간 분량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세 편이 넘는 길이다. 전개는 의도적으로, 억지로 느리게 느껴진다. 이런 점을 지적하면 사람들은 내가 느림 자체를 탓한다고 생각한다. 끊임없는 액션을 원하고 사색적인 서사를 견디지 못한다고 말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데어 윌 비 블러드도 느리다. 2001도 느리다. 그 영화들은 상영 시간의 1분 1초까지 정당화한다. 의도 있는 완급 조절과 쓸데없는 것들로 공백을 메우는 일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제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시즌을 마친 기묘한 이야기가 있다. 다섯 시즌을 통틀어 45시간이다. 쉬지 않고 보면 거의 일주일을 꼬박 봐야 하는 분량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18편에 해당한다. 반지의 제왕 확장판 전체를 다섯 번 가까이 돌려볼 수 있는 시간이다.
몽테뉴는 이렇게 쓴 바 있다:
“더 짧은 편지를 쓰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이 말은 지금 빠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짚는다. 바로 압축의 미덕이다. 불필요한 부분을 덜어내는 능력, 혹은 의지. 물론 전부를 덜어내라는 얘기는 아니다. 고기가 촉촉함을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의 지방은 필요하다.
훌륭한 예술가는 그 선이 어디인지 안다. 제약이 무한한 자유보다 더 나은 작품을 낳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이해한다.
제약은 창의성이 발휘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제약은 디자이너가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한계 안에서 혁신하며, 예상치 못한 해결책을 찾도록 이끈다. 제약이 없으면 디자인 과정은 방향을 잃고, 과도한 선택지와 초점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 제약은 장애물이 아니라 더 깊은 탐구와 정교한 의사결정을 위한 촉매로 보아야 한다. 1
영화의 상영 시간은 가차 없는 우선순위 설정을 강제한다. 모든 장면은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한다. 모든 서브플롯은 그 분량을 정당화해야 한다. 이는 꼭 필요한 기능만 담고 그 이상은 더하지 않는다는 Maximum Viable Product 철학과도 닮아 있다.
압축은 단순히 길이를 줄이는 일이 아니다. 증류에 가깝다. 아이디어의 본질을 파악해 가장 농축된 형태로 제시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말하는 문단과, 무언가를 말하면서 그럭저럭 관련은 있지만 사실은 별 관련 없는 세 가지 얘기를 덧붙이는 문단의 차이다.
스트리밍 시대는 스튜디오에게 압축을 버릴 경제적 유인을 안겨주었다. 구독자를 몇 주, 길게는 몇 달 동안 붙잡아둘 수 있는 시리즈를 만들 수 있는데, 왜 굳이 꽉 짜인 90분짜리 영화를 만들겠는가.
어쩌면 내가 문제일지도 모른다. 천천히 달아오르며 분위기를 쌓아가는 서사를 음미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저 투덜대는 늙은이가 되어가는 건지도 모른다…
![]()
하지만 그게 이유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여전히 느린 영화에 몰입할 수 있고, 밀도 높은 소설에도 빠져들 수 있다. 차이는 그 작품들의 완급이 의도적으로 느껴진다는 데 있다. 느린 순간 하나하나가 전체를 위해 존재한다. 그게 지향점이지, 이런 끝없는 쓰레기가 아니다.
각주
글을 무작위로 읽기